천부교 박태선 창교주...그를 재평가해야 한다!1955년 종교집회에 도합 500만명 모여…기적-이적 행했던 권능(權能)의 종교 창교주천부교를 창교한 박태선(1917~1990) 창교주(필자 주=천부교 교단에서는 그를 ‘하나님’이라 호칭하지만, 일반 신학적 입장에서 ‘교단 창교주’라 호칭함)는 1950년대 기적과 이적을 행했던 권능(權能)의 종교인-창교주였다. 이 종교(천부교)의 초창기는 대단한 신의 역사가 함께했다. 1955년, 서울의 남산-한강 모래사장-서울 제2운동장-서울 용산 군인교회-서울 영등포 집회에는 도합 500만명이 모였다. 남산집회에만도 60만명이 모였다.
한 자료는 “1955년 하나님(박태선 호칭)께서 전국 순회 부흥집회를 시작했다. 서울 남산 집회를 시작으로 전국 대도시에서 열린 집회에 1년 동안 연인원 5백만 명 이상이 참석했다. 하나님의 집회는 한번에 4~5만 명 이상의 인원이 모여 5일 이상 연속으로 개최되었다”면서 “당시 우리나라는 대규모 인원을 수용할 시설이 없어 넓은 공터에 천막을 치고 집회가 열렸기 때문에 ‘천막집회’라 불렸다”고 소개하고 있다.
HLKA(서울 중앙방송국)는 지난 1955년 3월2일 오후 5시-9시 뉴스시간에 박태선 장로의 종교집회에 관한 뉴스를 내보냈다. 이 방송은 기사에서 “놀라운 기사와 이적이 서울 한복판에서 행하여지고 있다. 박태선 장로는 그의 다년간의 ‘독실한 신앙생활에서 얻은 신통력’을 빌어 꼽추, 앉은뱅이, 장님, 조막손 등의 불구자들을 기도현장에서 완치하였다”고 알렸다.
당시 이 행사에 참석했던 한 신자는 “그날 장로님께서 병든 자는 일어나라고 했다. 그러자 앉은뱅이가 일어나 성큼성큼 단으로 뛰어 올라가 내가 리어카 타고 왔는데 일어서서 걷는다고 하고, 말을 못하던 벙어리가 마이크를 쥐고 어머니 아버지를 부르며 본인들도 감격해 울고, 그 광경을 보는 사람들도 울며 손뼉을 쳤다”고 회고했다.
최중현 박사는 브레이크뉴스 지난 2017년 4월29일자 “박태선 장로가 주도한 60만명 참석 '서울한강 백사장 집회'” 제하의 기고문에서 “실로 이 무렵 박 장로의 집회는 한국 개신교 역사상 그 어느 부흥사의 집회보다 더 컸고 그 분위기는 더 강렬한 바가 있었다. 신비스런 향취가 진동하는 것을 체험했다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고 고질병 및 난치병이 흔적도 없이 나았다는 사람들도 무수히 나타났다”고 평했다.
박태선 천부교 창교주는 당시 한 설교에서 “이번 집회에 여러분은 코로 백합화의 향기와 같은 맡게 될 것이다. 죄가 타서 송장을 태우는 냄새와 같이 누린내가 나는 것을 코로 맡게 될 것이다. 눈(雪)같이 이슬 같이 성신이 내리는 것을 눈으로 볼 것이다. 성신의 불이 떨어지는 것을 눈으로 볼 것이다. 다 숨을 크게 쉬어 보라. 시원하지 않으냐? 마치 인단(sic)을 먹은 것보다 더 시원하지 않으냐? 이는 공기가 아니다. 이는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생수(生水)이다. 이 집회에 참석하는 사람은 다 이 생수를 마시게 될 것이다. 그리고 사오십년 믿어도 해결하지 못한 모든 문제가 이 집회에서 다 해결될 것이다. 새로운 변화가 생기는 것이요, 전에 보지 못하던 새로운 역사를 볼 것이다. 선지자의 시대나 사도 시대에도 나타나지 않았던 큰 역사를 눈으로 보게 될 것이다. 이런 은혜가 있는 고로 나의 집회는 열릴 적마다 많은 사람이 모여드는 것이다. 이 땅에 언제 사오만명 모이는 집회가 있었던가?”라고 강조했다.
예수를 예수이게 한 것은 오병이어 기적. 물로 포도주를 만든 기적이 예수의 첫 기적이었다. 이와 유사하게, 박태선 장로(천부교 창교주)가 주도하던 종교집회에서도 기적이 잇따라 일어났다. 그러나 당시 기성교단은 불처럼 일어나던 이 교회와 천부교 박태선 창교주를 비난하는 데만 열을 올렸다. 1955년, 박 창교주의 한강 백사장 집회가 있었던 이후 ‘한국 기독교 연합회’라는 단체는 “박 장로의 운동이 정통 기독교가 아니다”고 선언했다. 성경을 설(說)하던 예수도 그 당시 사회의 반대에 부딪쳐 사형에 처해졌다. 박태선 창교주도 마찬가지였다. 극렬한 반대가 뒤따랐다.
박 창교주는 신앙촌 건설에 대해 “숯 덩어리는 혼자서 잘 타다가도, 피지 않은 숯 덩어리 속에 들어가면 그것마저도 불씨가 사그라져 버립니다. 그러나 반쯤 핀 숯 덩어리라도 한곳에 모아 놓으면 얼마 안 돼서 전부가 활짝 피어 타오릅니다. 마찬가지로 죄를 씻음 받은 사람이라도 보고 듣는 모든 것이 죄악인 세상에서는 잘 간직하고 지키기가 어렵기 때문에,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한곳에 모여 생활함으로써 선한 양심을 기르고 신앙을 키우기 위해 신앙촌이 세워진 것입니다. 신앙에도 단계가 있기에, 교인들의 믿음의 성장에 따라 소사신앙촌, 덕소신앙촌, 기장신앙촌이 건설되었습니다.”라고 설교했다.
천부교 교단 소식지는 신앙촌에 대해 “1957년 소사신앙촌을 건설하여 별천지와 같은 아름다움으로 당시의 세인들을 놀라게 하였고 1962년 덕소신앙촌을 건설하여 한강변의 별장과 같은 주택촌과 신앙촌 제품의 우수성을 전국에 떨친데 이어 다시 세 번째 신앙촌이 한반도의 동남쪽 기장 땅에 건설되는 것이었다. 다른 종교에서는 찾아볼 수 없고 인류 역사상에도 그 유례가 없는 신앙촌을 왜 하나님(박태선)께서는 그 어려운 여건을 무릅쓰고 세 곳이나 건설하신 것인가? 그 해답은 자유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 절대명제로 되어있는 천부교의 교리에서 찾을 수가 있을 것 같다. 자유율법이란 양심의 법이라고도 하는 하나님의 법을 말한다. 즉 마음이나 의식으로도 죄를 지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법이다. 자유율법은 워낙 고도의 법이기 때문에 성경에는 기록돼 있으나(야고보서 2장 12절) 다른 종교에서는 그 개념조차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신앙촌은 우리가 바로 자유율법을 지킬 수 있는 환경을 하나님(박태선)께서 만들어 주시기 위해 건설하신 곳”이라고 소개하고 “1970년 2월 28일, 부산 해운대에서 약 20km가량 떨어진 현재의 부산시 기장군 기장읍 죽성리, 학리, 삼성리, 동부리, 신천리 일원의 약 130만 평 부지에 기장신앙촌 건설이 시작되었다. 기장신앙촌 건설에는 덕소신앙촌 건설대와 각 공장에서 자원한 사람들이 참여하였다”고 소개하고 있다.
세계기독교사에서 천부교의 신앙 공동체 운동은 유례없는 성공사례일 수 있다. 대규모 신앙촌은 지금도 존재한다.
박태선 천부교 창교주를 재평가해야한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왜냐? 전쟁의 참화가 휩쓸고 간 피폐해진 민중들에게 종교적 희망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가 준 위로는 신의 대행자로서의 권능 그 자체였다. 기독교의 모든 교단은 한 하나님 아래 하나라는 초교파 주의적 관점에서 천부교도 재평가해야 할 것. 상호존중의 시각에서 다시 봐야 한다.
기장신앙촌의 경우 초기 규모가 130만평에 달했다. 이후 더 많은 땅이 매입됐다. 건설 당시는 경상남도 동래군 기장면이었으나 이후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으로 편입되어 부동산 가치가 치솟았다. 천부교 기장 신앙촌의 부동산 가격을 계산한다면, 수 십 조 원의 부자교단으로 거듭난 것. 박태선 창교주의 미래 예견력의 대단함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박태선 천부교 창교주는 대한민국이 낳은 큰 종교인이었다. 새로운 것을 두려워했던 이들이 그의 큰 종교적 이념과 남다른 생각을 탄압했다. 박태선, 그가 만약 미국에 태어났다면 그의 종교는 세계적인 거대 종교로 성장했을 것이라는 게 필자의 진단이다.
<집필 후기>세상에서는 박태선 천부교 창교주를 ‘박 장로’라고 부르는데 더 익숙하다. 필자는 박태선 천부교 창교주의 두 아들과 친분이 있다. 두 아들, 박동명-박경명씨를 만난 적이 있다. 박동명씨는 기자로서 인터뷰를 위해 부산 해운대 자택에서 여러번 만났다. 박윤명씨는 개인적 친분으로 서울에서 가끔씩 만났다. 박동명씨는 세상에 여러 풍문을 남기기도 했다. 그러나 박윤명씨는 조용하게 지내는 사업가이다. 박태선 천부교 창교주는 전쟁이 휩쓸고 간 한반도, 그 땅에 살아야만했던 한국인들에게 큰 종교적 위안을 줬다고 생각한다. moonilsuk@naver.com
*필자/문일석. 시인. 본지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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